불이 과하면 흙이 갈라진다, 화다토초(火多土焦)
불이 흙을 낳는다지만 볕이 지나치면 땅은 기름지기는커녕 메말라 갈라진다. 열의가 과해 정작 담을 힘을 잃는 구조를 읽는다.
불은 흙을 낳는다. 타고 남은 재가 땅에 스며 흙을 기름지게 하니, 볕과 열은 땅을 살찌우는 어버이다. 그래서 볕이 좋을수록 밭이 잘된다고 여긴다. 그러나 많고 적음은 늘 견준 말이라, 비 한 방울 없는 뙤약볕이 몇 달을 이어지면 그 볕은 밭을 기르는 대신 굽는다. 봄볕에 곡식이 오르지만, 같은 볕도 도를 넘으면 잎을 태운다. 알맞은 볕과 지나친 볕은 이름만 같은 볕이다.
낳아 주는 열이 지나치면 흙은 단단해지는 것이 아니라 부서진다. 물기가 다 날아간 땅은 쩍쩍 갈라져, 씨앗을 품기는커녕 겨우 내린 뿌리마저 밀어낸다. 이를 화다토초(火多土焦), 불이 많아 흙이 탄다고 한다. 낳는 힘이 넘쳐 도리어 낳긴 것을 메마르게 하는 자리이니, 열은 흙의 어버이이면서 동시에 흙을 태우는 불이 된다. 거두어 주려던 손이 어느새 태우는 손이 되는 셈이다.
여기서 뜨거움 그 자체는 죄가 없다. 문제는 그 열을 식혀 줄 것이 곁에 없다는 데 있다. 열의가 지나친 자리가 스스로를 태워 버리는 것도 이와 같다. 뜨거운 기운이 그른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 눅여 줄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이다. 같은 볕도 물을 낀 밭에서는 곡식을 여물게 한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먼저 물을 것은 볕을 어찌 줄이느냐가 아니라, 무엇으로 이 열을 받아 낼 것이냐다. 받아 낼 자리가 있으면 뜨거움은 곡식을 익히는 힘이 되고, 없으면 땅을 가르는 불이 된다. 같은 열을 두고 결과가 갈리는 것은 열의 세기가 아니라 곁에 무엇을 두었는가다.
그 곁에 둘 것으로 명리는 두 가지를 든다. 하나는 물(水) 한 줄기를 들여 넘치는 불을 눌러 주는 것이다. 열이 가라앉으면 갈라진 땅이 다시 물기를 머금는다. 다른 하나는 쇠(金)를 두어 흙에 고인 뜨거운 기운을 다른 데로 흘려보내는 것이다. 달군 쇠붙이가 열을 나눠 지듯, 열이 빠져나갈 길이 트이면 땅은 갈라지기를 멈춘다. 식힌다는 것은 열을 내다 버리는 일이 아니라 무언가를 담을 힘을 되찾는 일이다. 식힘은 포기가 아니다.
여기서 지금을 본다.
열의가 지나쳐 도리어 일을 그르치는 자리도 있다. 밀어붙이는 힘이 강할수록 좋을 것 같지만, 식혀 줄 틈 없이 달구기만 하면 정작 담아야 할 그릇이 먼저 갈라진다. 뜨거움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 낼 여백이 없어서다. 잠시 물을 들이고 열을 흘려보내는 일은 물러섬이 아니라, 다음을 담아내기 위한 준비다. 밭도 사람도, 쉬어 물기를 되찾은 자리에서 다음 것을 길러 낸다. 달굼과 식힘이 번갈아 도는 자리라야 그 열이 오래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