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가 많으면 물이 흐려진다, 금다수탁(金多水濁)
금이 물을 낳는다지만 쇠가 지나치면 물은 맑아지기는커녕 탁해진다. 근원이 과해 도리어 흐름이 흐려지는 구조를 읽는다.
금은 물을 낳는다. 바위 틈에서 샘이 솟고 차가운 쇠그릇에 이슬이 맺히니, 쇠는 물이 비롯되는 근원이다. 근원이 넉넉하면 물도 절로 넉넉할 듯싶다. 그러나 많다는 말은 늘 견준 말이라, 가느다란 물줄기 하나에 쇠가 지나치게 많으면 물은 맑아지기는커녕 흐려진다. 옹달샘 하나에 광석을 산더미로 쌓으면, 솟는 물이 그 쇳내를 다 씻어 내지 못한다. 근원이 클수록 좋다는 말이 늘 맞지는 않은 셈이다.
근원이 넘치면 흐름은 풍부해지는 것이 아니라 무거워진다. 쇳기운이 너무 짙게 녹아든 물은 탁하고 더뎌, 맑게 흐르지 못한 채 한자리에 고인다. 이를 금다수탁(金多水濁), 쇠가 많아 물이 흐려진다고 한다. 낳아 주는 것이 넘쳐 도리어 낳긴 것을 흐리는 자리이니, 밑천이 두터운 것이 늘 복만은 아니다. 샘이 깊다고 늘 물이 맑은 것은 아니어서, 근원이 클수록 그것을 다스릴 손도 함께 커져야 한다.
이 자리는 아는 것이 많아 도리어 정하지 못하는 자리다. 밑천이 두터운데 판단은 되레 느리다. 근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이 한데 고여 흐름을 무겁게 짓누른 탓이다. 정보가 모자란 문제가 아니라 흐름이 막힌 문제다. 그래서 이 자리는 남보다 많이 알고도 남보다 자주 망설인다.
그러니 여기서 더 배우고 더 채워 넣는 일은 흐림을 짙게 할 뿐이다. 맑히는 길은 보태는 데 있지 않고 흘려보내는 데 있다. 고인 물에 새 물을 부어서는 맑아지지 않는다. 막힌 곳을 터 묵은 물을 먼저 내보내야, 비로소 맑은 물이 그 자리에 든다. 그러니 이 자리의 처방도 채우는 쪽이 아니라 트고 흘려보내는 쪽에 있다.
터 주는 데는 두 길이 있다. 하나는 나무(木)로 물길을 내어 고인 물을 흘려보내는 것이다. 물이 나무를 적시며 빠져나가면 탁하던 흐름이 다시 맑아진다. 다른 하나는 불(火)을 두어 넘치는 쇠를 알맞게 다스리는 것이다. 지나친 쇠가 열에 녹아 제 양으로 줄면 물이 잃었던 무게를 되찾는다. 고이면 흐려지고, 흐르면 맑아진다.
여기서 지금을 본다.
배우고 쌓은 것이 많아 도리어 결정을 못 하는 자리가 있다. 아는 것이 늘수록 재고 따질 것도 함께 늘어, 한 걸음이 더뎌진다. 밑천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이 한꺼번에 고여서다. 그럴 때는 더 들이는 대신 흘려보내야 한다. 쥔 것을 한 번 풀어 밖으로 내보내고 나면, 무겁던 판단이 다시 가벼이 흐른다. 덜어 내는 일이 아까울지 몰라도, 흐려진 물은 비워 낸 만큼 맑아진다. 아는 것을 한 줌 내려놓는 자리에서 도리어 밝은 판단이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