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많으면 물이 마른다, 목다수축(木多水縮)
물이 나무를 기른다지만 기를 나무가 너무 많으면 물이 먼저 마른다. 내주는 쪽이 소진되는 구조를 읽는다.
물은 나무를 기른다. 뿌리에 스며들어 잎을 밀어 올리고 줄기를 굵히니, 나무가 자라는 것은 물이 제 몸을 조금씩 내준 덕이다. 봄마다 물이 오르고서야 마른 가지에 싹이 돋는 것을 보면, 기름과 내줌은 본디 한 가지 일이다. 그런데 명리에서 많다는 말은 절대량이 아니라 늘 상대에 견준 말이다. 물 한 줄기에 나무가 두어 그루라면 넉넉히 적시겠지만, 우거진 숲 전체가 같은 물줄기 하나에 매달리면 물은 그 많은 뿌리를 대다 저부터 먼저 마른다.
받아 가는 쪽이 지나치게 많으면 주는 쪽은 나뉘다 못해 바닥을 드러낸다. 이를 목다수축(木多水縮), 나무가 많아 물이 오그라든다고 한다. 앞서 첫 편에서 본 수다목부(水多木浮)와는 정확히 반대 자리다. 그때는 물이 넘쳐 나무가 떠올랐으니 어미가 많아 자식이 상한 것이라면, 여기서는 나무가 넘쳐 물이 마르니 자식이 많아 어미가 여위는 것이다. 같은 물과 나무인데, 어느 쪽이 많은가에 따라 상하는 쪽이 뒤바뀐다. 이렇게 내가 낳고 기르는 것이 지나쳐 정작 나를 마르게 하는 자리를 설기태과(洩氣太過)라 부른다.
이 자리의 어려움은 인색함이 아니라 지나친 후함에 있다. 뻗어 오는 가지를 하나도 마다하지 못하고 다 적셔 주다 제 물길이 얕아진다. 아까워한 적이 없으니 겉으로 티도 안 나고, 티가 안 나니 스스로도 언제 비었는지 모른다. 잘 내주었다는 말이 곧 다 내주었다는 말이 되는 자리다.
그래서 이 구조는 남에게는 후덕하다는 말을 들으면서 정작 제 안은 헛헛하다. 문제는 베풂 그 자체가 아니라 채움 없는 베풂이다. 내준 만큼 어디선가 도로 들여야 하는데, 그 순서가 빠져 있는 것이다. 마른 뒤에야 비로소 자신이 비었음을 알아차리니, 이미 물길이 얕아진 뒤일 때가 많다.
명리는 두 길을 든다. 하나는 쇠(金)를 두어 새 샘을 여는 것이다. 쇠가 물을 낳으니, 마른 물길에 새 근원을 대주면 다시 내줄 밑천이 선다. 다른 하나는 지나치게 뻗은 가지를 솎아 나무를 덜어 내는 것이다. 받아 갈 입이 줄면 남은 물이 마르지 않는다. 어느 쪽이든 요는 하나다. 채우고 나서야 다시 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이 자리의 이치다.
여기서 지금을 본다.
잘 베푸는 사람이 정작 제 안은 비어 가는 자리는 사람 사이에도 흔하다.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힘과 시간을 아낌없이 나눠 주다 보면, 곁의 사람들은 다 자랐는데 기른 쪽만 텅 빈다. 인색해서가 아니라 채우는 순서를 잊어서다. 그런데 이 자리는 그 비어 감이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후하게 내주는 일은 언제나 아름다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베풂을 멈추기보다 먼저 제 샘을 여는 편이 낫다. 내 물이 마르면 그때는 아무도 적실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