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으킨 불이 되돌아 태운다, 화다목분(火多木焚)
나무가 불을 일으키지만 불길이 너무 사나우면 그 불이 되돌아 나무를 남김없이 태운다. 내 손으로 키운 것에 내가 소진되는 구조를 읽는다.
나무는 불을 일으킨다. 마른 가지가 제 몸을 살라 불꽃을 피워 올리니, 불은 나무가 타서 된 것이다. 모닥불 앞에서 잔가지를 부러뜨려 넣어 본 사람은 안다. 나무가 제 몸을 내주는 만큼 불꽃이 살아난다. 그러나 많다는 말은 늘 견준 말이라, 잔불이라면 여린 나무도 넉넉히 감당하겠지만, 온 산을 삼킬 듯한 불길을 나무 한 그루가 홀로 떠받치려 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낳은 것이 지나치게 거세지면 낳아 준 쪽은 그것을 대느라 제 몸을 남김없이 내준다. 제가 붙인 불에 제가 타는 것이다. 이를 화다목분(火多木焚), 불이 많아 나무가 탄다고 한다. 앞의 둘째 편 목다화식(木多火熄)과 견주면 자리가 뒤집혀 있다. 그때는 장작이 너무 많아 불이 눌렸으니 어미가 많아 자식이 못 피어난 것이라면, 여기서는 불이 너무 세어 나무가 타니 자식이 거세어 어미가 스러지는 것이다. 같은 나무와 불인데, 많은 쪽이 바뀌자 마르는 쪽도 바뀐다. 내가 낳은 것에 내가 소진되는 이 자리를 설기태과(洩氣太過)라 한다.
불이 나쁜 것이 아니다. 그 불을 감당할 뿌리가 없는 것이 문제다. 같은 불도 아름드리 큰 나무에게는 겨울을 나는 온기가 되지만, 밑동 얕은 나무에게는 제 몸을 사르는 화가 된다. 세기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받칠 밑동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먼저 물을 것은 불을 어찌 줄이느냐가 아니라, 그 불을 받칠 뿌리가 얼마나 깊으냐다.
그래서 이 자리는 무언가를 뜨겁게 쏟아 낸 뒤에 유독 오래 앓는다. 표현도 열정도 다 제 몸에서 끌어다 쓴 것이라, 쏟고 나면 정작 자기가 남지 않는다. 남들이 그 불을 보고 감탄하는 사이, 정작 불을 지핀 나무는 재가 되어 간다. 겉불이 화려할수록 속의 밑동은 더 빨리 마른다. 더 태울 것을 찾기 전에 제 뿌리부터 살펴야 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그래서 명리는 물(水)을 먼저 든다. 사나운 불길을 물로 눅여 그 기세를 가라앉히고, 그 물이 도로 나무를 적셔 마른 뿌리를 살린다. 물이 불을 다스리는 동시에 나무를 기르니, 한 손으로 두 일을 하는 셈이다. 열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감당할 만한 크기로 되돌리는 것이다. 표현을 더 밀어붙이기보다 회복이 앞서야 하는 시기가, 이 자리에는 분명히 있다.
여기서 지금을 본다.
제가 벌인 일에 제가 타 버리는 자리는 사람 사이에도 있다. 열의로 시작한 일이 커질수록 그것을 대느라 정작 자신이 소진된다. 게을러서가 아니라 감당할 밑동보다 불을 크게 키운 탓이다. 곁에서는 대단하다 하는데 정작 본인은 속이 다 타 있는 경우가 그렇다. 그럴 때는 불을 더 지피기보다 잠시 식히고 제 뿌리를 적셔야 한다. 밑동이 살아 있어야, 그제야 다음 불도 다시 지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