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깊으면 쇠가 가라앉는다, 수다금침(水多金沈)
금이 물을 낳지만 물이 지나치게 깊으면 금은 그 안에 가라앉아 쓰이지 못한다. 흘려보낸 것에 스스로 잠기는 구조를 읽는다.
금은 물을 낳는다. 차가운 쇠붙이에 이슬이 맺히고 바위 틈에서 샘이 솟으니, 물은 본디 쇠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많다는 말은 늘 견준 말이라, 얕은 개울이라면 바닥의 쇳덩이도 반짝이며 드러나겠지만, 그 물이 자꾸 불어 깊은 못이 되면 정작 물을 낳은 쇠가 그 바닥에 가라앉아 보이지 않는다. 샘의 근원이던 쇠가 제가 낳은 물에 잠겨 자취를 감추는 것이다.
내보낸 것이 지나치게 깊고 넓어지면 내보낸 쪽은 그 안에 잠겨 형체를 잃는다. 이를 수다금침(水多金沈), 물이 많아 쇠가 가라앉는다고 한다. 앞의 다섯째 편 금다수탁(金多水濁)과는 정확히 반대다. 그때는 쇠가 너무 많아 물이 흐려졌으니 어미가 많아 자식이 탁해진 것이라면, 여기서는 물이 너무 깊어 쇠가 잠기니 자식이 많아 어미가 묻히는 것이다. 같은 쇠와 물인데, 많은 쪽에 따라 잠기는 쪽이 뒤바뀐다. 내가 내보낸 것에 내가 잠기는 이 자리 역시 설기태과(洩氣太過)라 한다.
이 자리는 표현이 곧 소진이 되는 자리다. 안의 것을 자꾸 말과 글로 흘려보내다, 정작 흘려보낸 그 물에 제가 잠긴다. 다 쏟고 나면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조차 흐려진다. 많이 말한 날일수록 정작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아득해지는 까닭이다. 쏟는 일과 남기는 일이 함께 헤아려지지 않으면, 내보냄이 곧 사라짐이 된다.
그래서 이 구조는 많이 내보낼수록 제 윤곽이 옅어진다. 담아 둘 자리 없이 흘려보내기만 하면, 흘러간 물은 자꾸 넓어지는데 그것을 낳은 쇠는 바닥에 가라앉는다. 남에게 건넨 말과 글은 세상에 넘치는데 정작 그것을 지어낸 사람은 어디에도 남지 않는 것이다. 쏟아 낸 말은 세상 것이 되고, 쏟아 낸 사람만 홀로 옅어진다. 문제는 내보냄 그 자체가 아니라 담을 그릇이 없는 데 있다.
그래서 명리는 흙(土)을 든다. 흙으로 둑을 쌓아 넘치는 물을 가두면, 깊이만 더하던 물이 비로소 제자리를 얻는다. 물이 그릇에 담겨 잔잔해지면, 바닥에 잠겨 있던 쇠가 다시 떠올라 제 모습을 낸다. 담을 그릇이 있어야 쇠도 뜬다는 것, 물을 막으라는 것이 아니라 물에 형태를 주라는 것, 이 자리는 비우기보다 담기를 먼저 배우는 자리다. 그릇이 깊어진 다음에야 내보냄도 비로소 남는 것이 된다.
여기서 지금을 본다.
안의 것을 다 쏟아 내고 정작 자신이 흐려지는 자리가 있다. 말을 많이 할수록, 내보이는 것이 많을수록, 정작 내가 무슨 사람인지 옅어진다. 아껴서가 아니라 담아 둘 자리 없이 다 흘려보낸 탓이다. 덜어 내는 재주가 뛰어난 사람일수록 도리어 남겨 두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럴 때는 쏟기 전에 담을 그릇부터 두어야 한다. 무엇을 내보낼지만큼 무엇을 남길지를 함께 정해 두면, 흘려보낸 것도 제 모습으로 돌아온다.